상한의 존재와 상한 내부의 배분은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계약의 형식이 정하지만, 후자는 개별 조항이 정한다. 그리고 실무에서 후자는 좀처럼 협상되지 않는다.
1현장
미국에서 큰 건설계약을 하다 보면 한국의 임원진은 흔히 안전장치를 원하고, 결국 GMP(Guaranteed Maximum Price)를 설정한다. 과연 GMP는 발주자를 위한 조건일까. 아니다. 중요한 것은 GMP 자체가 아니라 GMP의 조건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다. 이에 따라 호구 발주처가 될지 똑순이가 될지 갈린다.
GMP는 실비정산(cost-plus) 방식에 상한을 부과한 혼성 구조다. 미국건축가협회(AIA) 표준계약서 체계에서는 A133(발주자–시공관리자)과 A102(발주자–시공사)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상한을 초과하는 원가는 시공사가 부담한다. 이 지점까지의 위험 배분은 분명히 발주자에게 유리하다.
이 방식이 선택되는 전형적 국면은 설계가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공이 요구되는 경우다. 실무에서는 설계도서가 50~80% 수준에 도달한 시점에 실비정산 계약을 GMP로 전환하는 관행이 널리 관찰된다. 총액계약으로 확정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고, 실비정산에 머무르기에는 발주자의 위험 노출이 과도한 구간을 메우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전제가 도출된다. GMP는 불확실성을 배분하는 계약이지 가격을 인하하는 계약이 아니다. 이 전제를 놓치면 이후의 조항들은 일관되게 해석되지 않는다.
실제로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 제기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수렴한다.
“GMP인데 왜 변경계약이 계속 발생하는가.” — 범위 외 변경은 GMP 자체를 상향시킨다. 상한은 금액이 아니라 범위에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잔액이 발생했는데 발주자에게 귀속되지 않았다.” — 절감액 배분 조항이 작동한 결과다.
“컨틴전시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 승인 절차를 두지 않은 결과다.
세 진술은 서로 다른 사안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구조적 원인을 공유한다.
2진짜 문제
논의의 초점은 상한의 존재가 아니라 상한 내부의 구성에 있다.
GMP 금액에는 예외 없이 컨틴전시(contingency) 항목이 포함된다. 예상하지 못한 현장 조건, 도서 간 불일치, 범위 해석의 차이를 흡수하기 위한 예비비다. 문제는 이 항목을 규율하는 두 가지 질문이 계약서에서 자주 공백으로 남는다는 데 있다.
첫째, 사용 권한의 귀속. 시공사 컨틴전시는 발주자의 승인 없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발주자는 GMP라는 총액의 외곽선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내부에서 자금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는 관찰할 수 없다. 상한은 지켜지지만 가시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둘째, 사용 범위의 획정.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 넓게 정의되면, 본래 시공사가 부담하여야 할 견적 오류까지 컨틴전시로 흡수된다. 이는 위험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 이전의 문제다. 조항 하나로 시공사의 고유 위험이 발주자의 예산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 계약서의 공백 | 그대로 두면 | 문언으로 메우면 |
|---|---|---|
| 누가 쓰는가 | 시공사가 통보 없이 집행하고, 발주자는 총액의 외곽선만 본다 | 일정 금액 이상은 서면 동의 — 통제가 아니라 가시성 |
| 어디에 쓰는가 |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 넓게 해석되어 견적 오류까지 흡수된다 | 발주처 요구에 따른 물량·일정 변경으로 한정 |
예를 들어 중과실의 경우 컨틴전시를 쓸 수 없다고 정해 두었다고 하자. 과실과 중과실을 나누는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단순 과실이라면 건설사의 귀책이 있더라도 컨틴전시를 쓰게 되어 있다. 실제 공사에서는 나의 실수와 남의 실수,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실수가 뒤섞인다. 그럴 경우 건설사는 변경계약 건들을 모아 놓고 분류한다. 어떤 것이 실수로 인정될 수 있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가르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로 보이는 것은 모두 컨틴전시를 소모시키고, 아닌 것은 새로운 변경계약으로 신청한다. 따라서 GMP는 모두 채워지고, 추가 변경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3또다른 시선
지금까지의 논의는 발주자의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제의 강화라는 결론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통제는 무상이 아니다. 컨틴전시에 대한 감시와 절감액에 대한 청구가 강화될수록, 시공사는 그 위험을 GMP 산정 단계에서 선반영한다. 즉 사후적 통제의 비용은 사전적 상한의 인상이라는 형태로 발주자에게 되돌아온다. 계약 체결 이전에 이미 지불되기 때문에 발주자가 그 비용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컨틴전시 자체를 부당한 여유분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이 점에서 재고를 요한다. 그것은 정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착공하기 위해 지불하는 가격이다.
이렇게 보면 GMP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잔여 이익의 귀속이 아니라 정보의 시간적 배분에 있다. 계약 시점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정보의 위험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다. GMP를 늦게 확정할수록 정보는 축적되고 위험 프리미엄은 축소되지만 착공은 지연된다. 발주자가 실제로 선택하는 것은 상한의 높이가 아니라 이 교환의 지점이다. 이는 모든 사태를 사전에 규정할 수 없다는 조건 위에서 성립하는 불완전계약(incomplete contract)의 전형적 국면이며, 무엇을 명시하고 무엇을 사후 조정에 맡길 것인지의 판단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GMP가 발주자를 위한 계약인지 시공사를 위한 계약인지는 계약의 명칭이 아니라 계약서의 문언이 정한다. 동일한 명칭의 계약이 어떤 현장에서는 발주자를, 다른 현장에서는 시공사를 보호한다. 그 차이는 세 개의 문장에서 갈린다.
4Builders’ Insight
그 세 문장이 무엇인지가 남는다. 앞의 둘은 기존 계약서에서도 즉시 적용 가능한 문언의 문제이며, 나머지 하나는 계약 구조 자체의 설계에 해당한다.
(1) 컨틴전시를 GMP 내부에서 별도 항목으로 계상하고 집행 승인 절차를 규정한다. “1만 달러 이상 집행 시 발주자의 서면 동의를 요한다” 정도의 문언이면 충분하다. 목적은 금액의 통제가 아니라 가시성의 확보에 있다. 통제는 분쟁을 낳지만 가시성은 분쟁을 예방한다.
(2) 절감액의 정의에 “미사용 컨틴전시를 포함한다”를 명시한다. 이 한 문장이 시공사에게 컨틴전시를 절약할 유인을 창출한다. 배분율이 50 대 50이더라도 절약된 금액의 절반은 발주자에게 회수된다. 유인 구조를 바꾸는 편이 감시를 강화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3) 컨틴전시 사용 조건을 매우 엄격하게 정한다. 건설사의 과실이나 커뮤니케이션 오류 같은 모호한 조건은 제거해야 한다. 물량 증감이나 일정 변경에 관한 발주처의 요구에 쓰도록 한정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협상의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면 이 세 문장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 조항은 대체로 이 셋이 만든 결과를 정리하는 데 쓰인다.
참고자료
1. AIA Contract Documents, Guaranteed Maximum Price (GMP) Contracts and AIA Contract Documents.
2. AIA Contract Documents, A133-2019 Owner–CMc Agreement, Cost Plus GMP.
3. ConsensusDocs, The Contractor’s Contingency.






